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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루목(자목) 공소
 
병인박해(1866-1873)때 자루목(現 칠보산 밑)에는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낸 교우들이 있었다. 두세 가정밖에 되지 않았지만, 당시 3, 4세대가 함께 모여 사는 대가족 사회였기에 피난 온 신자들이 적어도 15명 이상은 되었다. 이곳 신자들은 30리 길이나 되는 왕림성당을 꾸준히 왕래하며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왕림본당(1888년 설립)에서는 자루목에 박해를 피해 형성된 교우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후 자루목 신자들의 열심한 신앙생활이 씨앗이 되어 왕림본당 제6대 김원영 아오스딩 신부 부임시절인 1914년에 자루목 공소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수원서부지역 일대의 첫 공소이자 ‘수원읍 공소’, ‘샘말 공소’에 이어 수원에서 세 번째 공소가 탄생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였기에 신자들의 신앙생활에는 여러 제약이 따랐다. 일제의 천주교 정책은 외국 선교사들을 통제하고, 신자들을 충실한 일제의 신민으로 만드는데 초점을 두었다. 동시에 일제의 경제정책은 한국인들을 궁핍하게 했고, 천주교 신자들에게 불리한 여건을 조성했다. 특히 각종 삼림 관련 법령은 산골에서 화전을 일구고 담배농사와 옹기업 종사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어 그들이 삶의 터전(교우촌)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도록 유도했다.
 
당시 자루목 공소는 칠보산 밑자락에 위치해 있었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삼림 관련 정책에 타격을 입어 인근 마을로 이주하게 되었고, 결국 공소 설립 9년째 되는 해인 1923년에 폐쇄되었다. 이때 신자 수는 53명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공소 폐쇄 후 같은 해에 ‘노로미(노림) 공소’가 인근 마을에 설립되어, 신자들은 이곳에서 천주교 신앙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노로미(노림) 공소는 명칭만 다를 뿐 자루목(자목리)공소가 인근 노로미(노림) 마을로 이전하여 설립된 공소로 볼 수 있다. 자루목 공소 폐쇄 후 같은 해 2km정도 떨어진 노림 구역에 설립되었고, 행정구역상 같은 수원군 매송면 호매실리에 속해 있었으며, 자루목 공소와 비교해볼 때 신자수 변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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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로미(노림)공소는 지금의 칠보 성당에서 300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노로미(노림) 공소는 1923년 왕림본당 6대 김원영 아오스딩 신부 부임 시절, 왕림본당 관할 공소로 인가되었고, 같은 해 폐쇄된 자루목 공소의 관할지를 그대로 이어받아 호매실리, 서둔말, 자목리, 금곡리 등을 관할하였다.
 
이후 1930년 11월 3일, 박일규 신부가 수원(북수동) 본당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부터 노로미(노림) 공소 관할 본당이 왕림 본당에서 수원(북수동) 본당으로 변경되었다. 박일규 신부는 이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달리 수원읍과 병점 뿐 아니라 수원읍 인근지역 공소들을 왕림본당에서 인계받아 관할하였기 때문이다.
 
노로미(노림)공소의 제1대 회장은 한동수 스테파노이다. 그는 1932년 3월, 본인 대지에 자비를 들여 작은 경당을 하나 지었다. 그러나 몇 해 지나지 않아 신자 수가 더 증가하여 1934년에 이르러서는 새 경당을 다시 지어야 했다. 한동수 스테파노는 수원(북수동) 본당과 왕림본당 신부에게 여러차례 자문을 구하였고, 화성군 남양에서 목수 한 명을 데려와 자택에 상주시키면서 신축 공사를 진행하였다.
 
1934년 8월, 호매실 396번지 대지 100여 평에 8칸의 경당을 착공하였고, 1935년 3월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초기 노로미(노림)공소는 톱으로 통나무를 잘라 기둥을 세우고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草家) 형태였지만 1955년에는 함석으로 지붕을 변경하는 공사를 진행 하였다.
노로미(노림)공소를 신축한 첫해 1935년에는 수원(북수동) 본당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방문하였는데 경당은 신자들이 다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가득찼다. ‘천주교 수원교구 50년사 – I. 교구사’에 기록된 교세 통계표에 따르면, 노로미(노림) 공소 신자수가 1933년에는 72명이었으나, 1936년 말에 이르러서는 154명으로 2배 이상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소 신축 후 2년도 채 안되는 사이에 2배 이상 신자 수가 늘어날 만큼 노로미(노림) 공소는 서수원 일대에서 복음화를 위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수원(북수동) 본당에서도 관할 공소 중 노로미(노림)공소가 제일 활성화되어 있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50년대에는 수원(북수동) 본당에서 방학을 맞이한 대학생들이 공소에서 지내며 밭일과 공소 일을 도우며 생활했다. 대학생 청년부의 공소 방문은 1968년 서둔동 본당이 설립되어 관할지가 변경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68년 서둔동 본당이 설립됨에 따라, 노림 신자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서둔동 본당에 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였다. 인근에 본당이 생겨 주일에 공소 예절 대신 미사참례를 하면서 공소 사용빈도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1993년 호매실 지역이 택지개발 사업지구에 편입되면서 결국 노로미(노림)공소는 폐쇄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인 1994년, 서둔동 본당에서는 호매실동 422번지 526평의 땅을 성당 부지로 매입하였고, 이 부지에 1996년 2월 호매실 지역의 첫 본당인 칠보성당이 설립되었다.
 
가. 노로미(노림)공소 역대 공소 회장
 

구분

성명(세례명)

재임기간

1

한동수 스테파노

1923~1962

2

한금수 마르티노

1962~1966

3

한영수 레오

1966~1972

4

한상린 바오로

1972~1978

5

이종래 바오로

1978~1980

6

한상택 안토니오

1980~1983

7

한융희 안토니오

1983~1986

8

김옥혜 에우독시아

1986~1986

9, 10

한상억 야고보

1986~1993

 

 

나. 노로미(노림)공소 관할 본당의 변화

 

년도

소속교구

소속본당

19231929

서울교구

왕림 본당

19301958

서울교구

북수동 본당

19591967

수원교구

고등동 본당

19681993

수원교구

서둔동 본당

 
수원 일대가 서서히 복음화 되면서 노림공소는 시기별로 총 4개 본당에 편입되어 있었다. 1923년에는 왕림 본당 관할이었다. 당시 왕림 본당은 수원군과 진위군 등을 관할하였다. 이는 수원, 오산, 화성, 평택18)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또한 왕림 본당의 6대 김원영 아오스딩 신부가 뮈텔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수원군 매송면 호매실리에 속한 노로미(노림) 공소에 대한 기록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후 1923년에 수원(북수동) 본당이 왕림 본당에서 분당되었고, 1930년에 노로미(노림) 공소는 수원(북수동) 본당 관할로 바뀌었다. 당시 수원(북수동) 본당 관할 구역은 노로미(노림) 공소가 속한 매송면 호매실리를 포함한 안룡면 오목천촌 및 대황교리, 태장면, 병점 등이었다.
 
1959년에는 수원(북수동) 본당에서 수원시 두 번째 본당인 고등동 본당이 분가하면서, 노림 공소는 고등동 본당 관할로 바뀌게 되었다. 고등동 본당은 수원시 매산로 1·2·3가, 고등동, 서둔동, 세류동, 평동 전 지역 및 화서동 일부와 화성군 안룡면(태안면) 오목천리, 반월면 사사리, 건곤리, 팔곡2리, 매송면 금곡리, 호매실리를 관할하였다.
 
1968년에 고등동 본당으로부터 칠보성당의 모 본당인 서둔동 본당이 분당 되었고, 이후 서둔동 본당이 노림공소를 관할하였다. 서둔동 본당은 수원시 서둔동, 구운동, 탑동, 율전동과 화성군 호매실리, 금곡리, 당수, 도마교, 일리, 양촌 사사, 건건, 팔곡 지역 그리고 시흥군 부곡, 사리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렇듯 노림 공소는 1923년부터 수원 지역에 본당이 하나씩 설립됨에 따라, 1930년에 관할 본당이 왕림에서 수원(북수동) 본당으로 변경되었고, 그 이후로 1959년 고등동 본당을 거쳐 1968년 서둔동 본당에 이르기까지 관할 본당이 순차적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1996년 서둔동에서 분당하여 호매실 지역의 첫 본당인 칠보성당이 설립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